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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버

문학238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ㅤ한 여자가 ㅤ차에서 ㅤ나온다 ㅤ작은 차 하나가 강을 따라 난 길을 달린다. 변두리 끝자락과 시골 사이 어디쯤, 집이 점점 드물어지고 행인도 없는 곳, 찬 아침 공기에 그 볼품없는 풍경이 더 처량해진다. 차가 길가에 멈추고, 그만하면 미인이라 할 젊은 여자가 내린다. 이상한 일이다. 여자가 자동차 문을 아무렇게나 툭 밀치기만 하는 것을 보면 문이 잠기지 않은 게 분명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둑들의 시대에 이토록 부주의할 수는 없을 텐데, 이는 무슨 의미일까? 그녀는 그렇게 정신이 없는 걸까? ㅤ아니, 정신없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다. 이 여자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를 안다. 이 여자는 의지 그 자체다. 그녀는 강에 놓인 다리를 향해 몇백 미터쯤 걷는다. 꽤 높고 .. 2023. 7. 14.
임현, 고두 ㅤ그런 사람으로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단다.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 그러나 그것은 내가 보다 선량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다만 아버지가 모르는 걸 내가 알았을 뿐. 그렇게 사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쪽이 더 이익이 된다는 걸 말이다. 모든 이타적인 행동에는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단다. 선물을 준다는 것은 돌려받을 대가를 바라서 이고 남을 위한 칭찬은 곧 나의 평판으로 이어져서 훗날을 도모하는 밑거름이 되지. 알아듣겠니? 지금 당장에 손해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나중의 이익을 담보하게 된단다. 손해 아니라 투자. 선물 아니라 거래. p.43-44 2022. 8. 2.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이렇게 되면 그토록 명백하고 그토록 정복하기 어려운 부조리는 한 인간의 삶 속으로 되돌아와 그의 고향을 되찾는다. 이때 역시 정신은 명석한 정신의 노력이라는 삭막하고 메마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길은 이제 일상생활 속으로 접어든다. 그 길은 이름 없는 ‘세인(世⼈)’의 세계와 합류하지만 인간은 이제부터 그의 반항과 통찰력을 간직한 채 그 곳으로 되돌아간다. 그는 희망을 갖지 않는 법을 배운 것이다. 현재라는 이름의 지옥, 이것은 마침내 그의 왕국일 수밖에 없다. p.94 2022. 6. 8.
한강, 흰 ㅤ이 낯선 도시에서 왜 자꾸만 오래된 기억들이 떠오르는 걸까? ㅤ거리를 걸을 때 내 어깨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말, 스쳐지나가는 표지판들에 적힌 거의 모든 단어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움직이는 단단한 섬처럼 행인들 사이를 통과해 나아갈 때, 때로 나의 육체가 어떤 감옥처럼 느껴진다. 내가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2022. 3. 8.
손미, 전람회 한번 만나요 매일 멸망하고 있으니까 안 그러기로 했는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요 북반구가 흩날리는 미술관에서 등에 붙은 꿀벌은 비상구로 날려 주고 한번 만나요 아직 돈이 없어서 미안해요 옷에 불을 질러서 미안해요 사람들이 울먹이며 복음서를 읽는 세기말이니까 땅이 뒤집혀 생긴 추상화에서 봐요, 우리 해골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여 줘요 살았는지 확인해 보려고 어깨를 건드리는 거리에서 당신이 돌아보았을 때 종말을 전시하는 비엔날레 현수막이 펄럭인다면 여기가 세상 끝이니까 하늘에서 윙윙 벌이 쏟아지니까 더 움직일 수 없으니까 재난 경보음이 울리는 미술관에서 한번 봐요, 우리 밖에서 보자고 해서 미안해요 살아 있는 당신을 오래 관람해서 미안해요 창밖은 부옇고 우린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으니까 딱 한 번만 만나요 2022. 2. 22.
백석, 바다 바다ㅅ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올으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다ㅅ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 비눌에 하이얀 해ㅅ볓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2022. 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