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8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ㅤ토마시가 문을 열고 불을 켰다. 그녀는 나란히 붙어 있는 침대 두 개와, 머리맡 램프가 달린 탁자를 보았다. 불빛에 놀란 커다란 나방이 전등갓에서 빠져나와 방 안을 맴돌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희미하게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p.507 2021. 10. 8.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ㅤ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자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p.506 2021. 10. 8.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ㅤ그리고 이런 점도 있다.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빌적 사랑이다.(테레자는 다시 한 번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며 깊은 회한을 느꼈다. 어머니가 모르는 마을 여자 중 하나였다면 아마도 그녀의 쾌활한 천박성이 테레자에게 호감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아! 어머니가 남이었다면! 어머니가 자기 얼굴 윤곽을 그대로 지 녔으며 그녀로부터 자아를 탈취해 간 것에 대해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항상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너희 아버지와 너희 어머니를 사랑하라’라는 천 년간의 명령이 그녀로 하여금 자기와 어머니의 닮은 점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폭력을 사랑이라고 명명하도록 강요한다는 점이었다. 테레자가 어머니와 결별한 것은 어머니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어머니와 인연을 끊지.. 2021. 10. 8.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ㅤ그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 힌 쌍을 괴롭히는 질문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p.481-482 2021. 10. 8.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ㅤ토마시는 카레닌이 누워 있는 방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카레닌과 함께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두 사람은 각각 한쪽에서 개를 내려다보았다. 이 공통된 행동은 화해의 몸짓이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각자 홀로 있는 셈이었다. 테레자가 자신의 개와 함께 있고, 토마시도 자기 개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ㅤ나는 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각각 떨어져서 혼자 있지 않을까 무척 두려웠다. p.478 2021. 10. 8.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ㅤ내 눈앞에는 여전히 나무둥치에 앉아 카레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류의 실패에 대해 생각하는 테레자가 있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이미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ㅤ 그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달리 말해 그의 정신 질환이 발병한 것이 정확하게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의 광기(즉 인류와의 결별)는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그 순간 시작되었다. 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2021. 10. 8.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