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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독백

다수자의 시혜적 이해

by 연정 2021. 8. 4.
사랑 받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은, 사랑을 주지 않으면 빈정이 상한다. 사랑 주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은, 사랑을 주는 행위가 익숙하여 더 주려고 노력한다.

다수자와 소수자 관계의 역학에도 적용할 수 있는 논리 같다.

ㅤ나는 일평생 남들에게 나를 설명하려고 발버둥치며 살아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내가 뭘 느끼고 내가 어떻게 상황을 받아들이는지. 언어로 구체화할수록 나에 대해 알아가는 점이 늘어나고 있다고 낙관하며, 때때로 부끄러워질 때에 나를 다독이며 끊임없이 발설해왔다. 들어달라는 아우성일 때도 있었고 조그마한 공간에 읊조리는 독백일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를 이해시키는 것은 일종의 과업처럼 굳어졌다. 거의 모든 친밀한 관계에서 이해시키는 역을 도맡았다. 상대방이 이해해줄 거라는 기대를 하든 않든, 나는 설명하는 걸 의무처럼 여겼다. 슬프다면 슬픈 점은 나는 자주 소수자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소수라는 말에 담긴 감정을 알지 못 했다. 지금도 솔직히 말하면 낯설다. 소수가 뭐길래 별난 이 취급을 받으며 다수 속에서 밀려날까. 도대체 소수 딱지가 뭐길래. 아무튼 이러한 특수한 맥락 속에 놓였다는 자각 없이 나를 설명하려고 하니 매번 실패했다.

ㅤ자주 그런 비난을 받았다. 왜 너는 날 이해시키지 않니. 왜 더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니. 제대로 말을 하지 그랬어. 왜 속단해서 일을 그르치니. 나는 이 말들이 맞는 줄을 알았다. 나를 얼른 바꿔야만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면을 썼다. 다수가 바라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가면을. 결과는 어땠을까. 중간 과정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면 실패했다. 나는 여전히 나였다. 믿을 수 없었다. 정체성 탐구를 할 때는 한없이 모호하게만 느껴졌던 '나'의 개념이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는 곧은 기준으로 다가왔다. 나한테도 '나'라는 게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기름 속에 물이 녹아들기 위해서는 맛없는 비누를 머금어야 한다. 물이 비누를 온몸에 바르고 기름 속으로 뛰어들듯이, 나는 '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다수 틈에서 많은 모순을 저지르며 살아왔다.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쳐야했다. 비눗물도 여전히 물이었는데.

ㅤ지금은 설명해야 한다거나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지 않는다. 이해받는 쪽은 다수고 이해하는 쪽이 소수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최은영의 소설 <모래로 지은 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왜 이해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정해져 있을까." 그 말대로다. 이해하지 못 하면 죽기 때문에 이해함을 자처하는 것이고, 이해받는 쪽이 당연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만나면 그 타자를 탓하는 것이다. 너의 존재가 바로서지 않아 나의 인식을 거스른다. 너를 바꾸거나 나를 이해시켜라. 당장. 나는 이 요구들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되새기고 있다.

ㅤ물론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설명, 이해의 교류는 무척 편리한 것이다. 그건 나의 선택이 반영된, 일종의 주체적인 발화라고 해야 할까. 생존을 위한 설명이랑은 결이 다르다. 관계에서 버려지고, 밀려나고, 고립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전제로 하는 설명과 나의 인식에 기반해 펼치는 주장 섞인 설명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이 차이는 극명한데 나조차 이 간격을 무시하고 다 같은 '설명'의 테두리 안이라 치부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자책을 많이 했다. 왜 다수자에게 나의 삶을 이해 못 시켰을까? 나의 언어 능력이 부족한 게 틀림없어. 내가 조금 더 부지런했으면 행동으로도 보여줬을 텐데. 왜 나는 이렇게 모자람이 많아 이해받지 못할까? 하는 속엣말들.

ㅤ이제는 증명의 욕구를 끊어버리겠다고 말한다. 증명은 동등한 관계에서 하는 짓이 아니다. 권력 차가 형성된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몸부림이다. 나는 소수자지만 다수가 당연하게 요청하는 '납득되게 설명해주세요.' 하는 말에 '제가 왜요?' 라고 받아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 설명 요구를 당연히 할 수 있다는 게 당신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반증이다. 납득시켜달라는 말은 결코 상대를 동등하게 볼 때 나오는 말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자주 다수자-소수자 관계에서 포착되는 은밀한 폭력의 언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짚는다. 나는 주체적으로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부분을 설명하며 살아가고 싶다.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려 나를 조각조각 해부하며 전시하는 일이 이제는 수치스럽고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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