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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시

김선우, 비바리, 잃어버린 구멍 속

by 연정 2021. 11. 16.

ㅤㅤ지하도를 나오는데 눈이 내렸다 검은 눈발 속에서 쏟아져 나와
ㅤㅤ출구에 들러붙는 비바리 떼, 내 구멍이······ 어디로 간 걸까······
ㅤㅤ이 도시는 하나의 구멍으로 규정된다 비바리, 너에게 갈 수가 없다


ㅤ돌담 속 너의 꽃잠 만진 적 있지
ㅤ어슷어슷 검은 돌 올려 쌓은 돌담엔
ㅤ돌의 수만큼 다 다른 구멍이 있어
ㅤ바람이 날마다 다른 페이지로 열렸네
ㅤ점자로 읽고 읽히면 바람과 놀다 너의 잠을 엿보았지
ㅤ다 다른 구멍 속의 살굿빛 처녀들
ㅤ몸빛 스며든 구멍 속이 너무 환해서
ㅤ세찬 바람에도 섬의 돌담 무너지지 않았네
ㅤ구멍 속에서 돋아난 빛들 저마다 고와졌네

ㅤㅤ비바리, 명랑한 체위의 망명자여 너의 고향은 머나먼 열대라 했다
ㅤㅤ다 다른 구멍을 향한 너의 열망이 다 다른 구멍을 가진 이 섬의 돌
ㅤㅤ담에 닿게 했다던가 이슬처럼 물에 구멍을 타고 왔다 했던가


ㅤ내가 먼저 죽으면 너의 배꼽 속에 들어가 살게
ㅤ네가 먼저 죽으면 너도 내 배꼽 속에 들어와 살렴
ㅤ네가 잘 들어올 수 있게 배꼽을 열어줄게 보드라운 혀처럼
ㅤ살굿빛 바람이 돋아나길 기다릴게

ㅤㅤ검은 눈송이를 맞는다 지하도를 나오면서 바싹 마른 미라의 입을
ㅤㅤ열며 내가 말한다 쪼글쪼글한 검은 입술로 매캐한 바람을 빨아
ㅤㅤ먹으며

ㅤ있잖니, 나, 배꼽을 잃은 지 오래되었어.


*비바리뱀: 제주도에 서식하는 멸종 위기의 뱀. ‘비바리’는 제주 방언으로 처녀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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