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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독백

몸과 성과 사회

by 연정 2021. 9. 17.

ㅤ언니단 마지막 편지가 몸에 대한 이야기길래, 읽으며 생각이 꽤 많아졌다. 우선 몸과 전쟁이라는 부분에 꽤 동의했다. 필자가 짚은 부분과는 또 다른 의미의 전쟁이겠지만 말이다.

김혼비, 언니단 우리의 그라운드를 넓게 쓰는 법 中

ㅤ지정 성별 여성의 몸을 갖는 것은 일종의 저주 같았다. 어릴 때부터 다리에 근육이 배기는 걸 걱정했으며, 복부의 살이 늘면 어떡하지 고민하고. 운동을 무척 좋아했던 나지만 근육을 없애서라도 살을 걷어내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중학교 내내 그 문제를 앓았다. 치마 하복이 싫었다. 내 허벅지와 종아리를 마주하는 일이 싫었다. 차라리 체육복이 나았다. 종래에는 동복 하복 모두 바지를 구입해 입을 만큼 내 다리를 가리는 일에 열중했다. 그도 그럴 게, 나 역시 아름다운 몸에 대한 로망을 가진 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걸 '여성적 매력'이라기보다는, 탐미의 일종으로 내 몸도 나의 미적 기준에 부합하길 바랐던 것 같다. 그때의 내가 인정하는 '아름다움'의 반경은 무척 좁았으니 근육진 몸이 들어찰 구석이 없었다. 단지 남성에게는 근육이 허용된 것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여자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알았고. 그러다 여러 과정을 거쳐 몸에 붙은 근육을 긍정하고, 건강을 선망하게 되고, 나의 몸을 깎아 없애고 싶다는 자기파괴적 욕구를 덜어내게 되었다. '여자가 항상 그러지 않아도 돼.'라는 말. 그리고 여성성에 근육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말. 나에게 한시적 위로를 주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부분이 딱 채워지지는 못했다. 분명 누군가는 그 말로 만족하며, 자신의 몸을 긍정하고, 자신이 찾은 새로운 가치를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나 역시 그게 가능할 줄 알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노력을 버리게 됐다. 어째서였을까.

ㅤ(물론 바디 포지티브가 만사 답이라는 말은 아니다만.) 심각한 디스포리아, 그러니까 외적으로 드러나는 부정을 겪은 적은 없다. 그저 자고 일어나면 내 몸이 바뀌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바라본 적은 있다. 물론, 나도 안다. 몸에 대한 인식과 성별 정체성은 같지 않다는 사실. 그러나 그걸 넘어서, 내게 평생 '여성' 태그를 달지도 모를 이 몸이 부담스러웠다. 여성의 2차 성징을 얘기하면 어느새부턴가는 언제나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전까지, 나의 마음을 의식 않고 '일반인의 마음, 행동 양식'을 흉내내는 일에 매진할 때엔 이렇지 않았는데. 그냥 다른 사람들이 긍정하는 가치를 빨리 알아내고, 나도 그런 줄로만 알고 그 가치를 내게 적용해 나도 그에 맞추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 가치에 한 번 배신 당하고 찾은 다른 가치 역시 딱 맞질 않아 기분이 깔끔하지 못했다. 그렇게 몸에 대한 마음은 내게 미제로 남는 듯했다. 요즘은 조금 다르다. 내가 뭘 원했는가 고민해보니 실마리가 보였다. 어른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지만, 나는 제 3의 몸을 바랐다. 나는 그림을 가끔 그린다. 구도를 잡을 때는 성별을 의식하지 않고 원형의 인간으로 대강의 형체를 잡는다. 딱 그런 몸을 바랐다. 분류되지 않는 원형의 몸. 가슴은 적당히 근육이 있으며 평평한 '중성적' 느낌을 주며, 잔근육이 있고, 다리 샅에 부여해야 할 성기는 생략된 그런 몸. 이 몸을 변형하여 성을 부여할 때면, 어쩐지 우울하고 부담스러워지는 느낌을 가졌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중학생 때의 일이다. 지금도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다. 물론 성기 여부를 성별을 부여하는 버릇으로부터 나를 멀리 하고 있지만, 여전히 몸체의 어떤 특성이, 특히 성징이라 불리는 것을 내 스스로 묘사하는 게 부담스럽다. 혐오스러운 정도는 아니다. 주위에 실재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성징이 발현되지 않을 몸으로 태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내 몸에 대한 이 기묘한 감각, 내가 가진 몸이면서도 완전히 내 몸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 나아가 내 몸의 일부는 사회가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음을 깨달아 버렸다.

ㅤ몸에 대한 인식과 성에 대한 인식은 제각각이었지만 그 회로는 비슷하다. 그냥 분류되고 싶지 않다. 분류가 나에게는 인공적인 것이라, 무엇 하나 지어내서 말해야 할 것만 같다. 그게 사회화라지만, 애초에 나는 사회화에 썩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내가 목도한 사회는 경쟁에 미쳐 남을 바닥으로 밀어버리는 것이 당연해진 공간이었기에, 나는 그곳에 적응하기 싫었다. 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정체성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이런 나로 자라 지금 여기에 있다. 분류 당하기 싫어 무(無)를 택한 인간. 한 때는 여성성의 범위가 넓어지면, 내가 사회에 비빌 언덕이 마련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찼던 적도 있었으나. 그냥 분류당하는 게 싫은 인간은 결국 이곳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따라서 항간의 '젠더는 허상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면 늘 묘한 기분이 든다. 허상 맞다.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이다. 그리고 다수가 그를 당연히 받아들여 자신의 내면에 체화한다. 문명도 결국 허상 아닌가? 다 부질없는 말이다. 허상이면 뭐하나. 사회 안에서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데. 정체성을 정의해야 할 의무를 지는 사회의 일원에게 가장 가벼운 짐이 되는 걸.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그게 목숨 옥죄는 돌덩이가 되니 퀴어 이론이 탄생한 건데, (퀴어 이론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므로 실제 역사와 불일치할 수 있다.) 사회의, 문명의 기반을 부정한다 한들 그 영향력이 사라지냐는 말이다. 말하자면 논점 아웃인 얘기를 구호 삼으니 말이 통하지 않는다.

ㅤ아무튼 몸-성-사회로 얘기가 확장했는데 간단히 축약하자면 이렇다. 나는 이 사회가 싫고, 이 사회가 정해준 정체성에 따르기 싫고, 따라서 나는 탈출구를 찾고 싶었고, 그게 설령 불가능할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이분법으로부터 도망쳐 다닐 것이다. 그게 내 본성이든, 길러진 특질이든 상관없다. 난 여기에 이미 있고, 태어나 버렸고, 양육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나간 과거를 돌릴 수 있는 가역성을 한낱 인간이 가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갈 수밖에. 그러니 나는 일평생 몸을 부정하며 살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몸에 대한 욕구는 다 충족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괜찮다. 어차피 태어난 것조차 내 의지가 아니었던 이상, 내가 완벽히 긍정하지 못하는 몸에 틔어난 의식이라도 나는 괜찮다.

ㅤ다만 죽는 순간에도 나라는 존재는 나를 항상 낯설게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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