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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독백

자가상담

by 연정 2021. 9. 26.

ㅤ내일은 바다에 가 봐요.
ㅤ같이 갈 사람이 없는 걸요.
ㅤ친구 없나요? 내 얘기를 하지 않아도 좋을 친구요.
ㅤ보통 그런 사이를 친구라고 하나요?
ㅤ하긴 그렇죠. 그건 친구라고 부르지는 않죠. 스쳐가는 사이쯤 되려나.
ㅤ바다까지 가줄 만큼 여유가 있는 '스쳐가는 사이'는 없네요.
ㅤ그럼 혼자라도 가요. 외로우면 혼자서 아무 얘기나 해보는 거예요.
ㅤ미친 사람으로 볼 걸요? 생각해 봐요. 버스 타서 혼자 중얼중얼···.
ㅤ이어폰이나 헤드셋이 있잖아요. 통화하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이참에 이름도 붙여 봐요.
ㅤ상상 속의 나한테요? 그건 너무 거창해요. 실체감을 갖게 되잖아요. 진짜 미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거부감 들어요.
ㅤ미치면 안 될 것 같아요? 두려워요?
ㅤ네. 미치면 혼자 남을까 봐. 두려워요.
ㅤ미친 사람 보면 도망가고 싶어요?
ㅤ······그건 아닌데. 모르는 사람 보면 가까이 있기 싫어요. 미쳤든 안 미쳤든. 딱 봐서 이상해 뵈는 사람이면 멀어지겠죠.
ㅤ그런 거 말고요. 속에서부터 미치는 것 있죠. 겉으로는 안 드러나고.
ㅤ그러니까 속까지 썩어있는 사람 싫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ㅤ네.
ㅤ싫다고 하면 자기 혐오로 비춰질 것 같은데.
ㅤ솔직하게 얘기해요. 속일 것 없잖아요.
ㅤ너무 싱싱한 사람은 싫고 적당히 상해 있되 저보다는 덜 상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ㅤ꽤 구체적이네요. 이유는요?
ㅤ싱싱한 사람은 나를 이해 못해요.
ㅤ그리고.
ㅤ상한 사람은 이해는 하는데··· 나보다 더 썩은 사람은 자기 고통에 매몰되어 있어서 별로예요.
ㅤ당신은요?
ㅤ저도 조금 제 생각만 하는 편이죠. 남 이야기에서 저를 찾고···.
ㅤ그래서 자기 혐오라는 말을 꺼냈구나.
ㅤ근데 저는 경계선에 서 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그 사람 말을 들으니까요. 제 생각만 하는 건 무례하니까. 적어도 들으려는 노력을 해요.
ㅤ뭐라고 안 했어요.
ㅤ변명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ㅤ이유 없는 자기 혐오는 아니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죠?
ㅤ네. 근데 고칠 마음 없어요. 저 지쳤고 피곤하거든요. 그리고 자기를 뒤엎는 짓이 얼마나 무용하고 고달프고 품이 많이 드는지 이젠 알아서. 노력할 마음 없어요. 주어진 대로 살 거예요.
ㅤ뭐라고 안 했다니까.
ㅤ근데 저한테 너는 평생 그렇게 살 거라고 하면 반기가 들어요. 아닌 척해 보이고 싶어요. 그 말의 주인 시야에서만. 그럼 그 사람 세계에서 저는 적어도 반박을 하는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ㅤ그런 영향력을 갖고 싶어요?
ㅤ조금 달라요. 영향력을 부정하고 싶은 거예요. 증명하려는 노력 자체가 이미 영향 받는 건데. 그 순간에는 충동을 이기지 못해요.
ㅤ그렇구나.
ㅤ······.
ㅤ······.
ㅤ우리 되게 멀리 왔네요. 바다에서 여기까지.
ㅤ그럼 바다 가는 일은 그보다 더 가깝겠네요.
ㅤ그렇네요. 내일은 바다에 가야겠어요.
ㅤ그래요. 일찍 가는 게 좋을 테니까 이만 보내줄게요. 잘 자요.
ㅤ고마워요.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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