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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

은희경, 새의 선물

by 연정 2021. 11. 12.

ㅤ아줌마는 별 반응 없이 조리로 쌀을 일기 시작했는데 손놀림이 아주 규칙적이었다. 쌀을 다 일고는 말없이 놋숟가락으로 무 껍질을 긁어낼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엄마가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자 등뒤에 업힌 재성이가 답답하다고 꼬물거리는 것을 뒤로 손을 돌려 아기  엉덩이께를 두어 번 탁탁 두드려주고 계속 무 껍질만 긁어대는 모습이 그런 것은 전혀 대수로운 일이 못 된다는 얼굴이었다.
ㅤ하지만 내가 보기로는 그런 아줌마의 표정은 오래 전에 끝난 전쟁의 뒷소식을 듣는 담담함이라기보다는 폭풍 전의 고요 같은 불길함이 있었다. 단단하게 다문 입속에서 아줌마의 혀는 어떤 반란 의 격문을 부르짖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줌마처럼 자기의 고통을 드러내놓지 않는 사람은 그 고통을 가슴속에 쌓아놓고 있는 것이다. 해소되지 못하고 가슴속에 차곡차곡 압축 저장된 그 고통은 언젠가는 엄청난 폭발력으로 터져나올 수도 있다. 그렇게 가슴속에 고통을 꾹꾹 눌러 저장하고 있다는 것이 아줌마가 품고 있는 진정한 비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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