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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

이도우,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by 연정 2021. 8. 19.

ㅤ"그러지 말아줄래요?"
ㅤ천천히 돌아보니 그는 겉으로는 별 표정 없이 음악을 고르고 있었다.
ㅤ"적당한··· 경계선 확실한 인사.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덤핑 처리하는 인사. 차라리 나한텐 하지 말아요, 그렇게 싫으면."
ㅤ진솔은 어렵게 쓴웃음을 지었다. 힘들다, 정말 이 남자는.
ㅤ"아예··· 인사도 하지 말라는 뜻인가요?"
ㅤ"애써서 하는 줄 아니까 반갑지 않아요. 하나도 편하지 않는 인사 받는 게, 뭐가 좋겠어."
ㅤ"내 마음이 편한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서요."
ㅤ건이 어둡게 웃었다.
ㅤ"편할 리가 없지. 내가 안 편한데."
ㅤ진솔은 바구니 속 음반들을 정리해 넣으며 정리해 놓으며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ㅤ"나는 댁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 지내니까··· 내가 힘들 거라고 짐작하지 않아도 돼요. 사실, 우리가 무슨 사이였다고 미워하겠어요. 소위··· 깊은 사이도 아니고, 내가 일방적으로 감정이 기울었던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ㅤ건이 출입구 쪽으로 뚜벅뚜벅 가더니 방음 장치가 된 두꺼운 문을 탁 닫고 락을 걸어버렸다. 진솔이 놀라서 쳐다보는데 건은 다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가 주춤 뒷걸음질을 치자 음반 진열장에 등이 닿았다. 진솔은 그만 진열장과 그의 팔 사이에 갇혀버렸다. 건은 은근히 열이 받았는지 낮게 비웃었다.
ㅤ"방금 뭐라 그랬어요. 소위, 깊은 사이? 육체적인 관계를 말하는 거요?"
ㅤ그들 사이에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출입문은 굳게 닫혔고, 복도로 난 유리창으로는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진열대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ㅤ"그럼, 만약 우리가 같이 잤으면 헤어질 수 없었을 것 같아요? 바보다. 자는 건 쉬워."
ㅤ진솔은 굳은 얼굴로 그를 응시했고, 건은 화가 난 채 안타깝게 한 걸음 더 그녀 앞으로 파고들었다.
ㅤ"그래서 우리가 같이 잔 적이 없어서, 섹시하다고 느꼈던 순간이 없었나? 나하고 같이 있으면서 가슴 두근거린 적 없었나? 당신, 마음으로 자지 않았어? 그럼 이미 잔 거지."
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귀밑까지 붉어지고 말았다.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목소리가 떨려 나왔지만 애써 태연하게 대꾸했다.
ㅤ"···얄밉게도 말하네요. 비약하지 마요."
ㅤ"뭐가 비약인데? 난 몇 번이나 상상했어요. 공진솔하고 사랑하면 어떤 느낌일까, 미치게 궁금했어요. 뭘! 내가 그리 앞뒤 생각하면서, 비겁한 놈 안 되려고 자제하지 않았다면 우린 벌써 잤겠죠. 하지만 그랬다고 해서 당신이 도망 안 갔을까!"
ㅤ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그의 눈빛에 사로잡혀 진솔이 숨도 못 쉬고 있는데, 건이 가만히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ㅤ"당신하고 같이 한 일들이 너무 많았어. 그거 정 떼느라··· 나 어려워요, 요즘."

p.414-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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