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독백

기대와 배신

연정 2021. 12. 5. 14:49

ㅤ기대를 가지면 꼭 배신 당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큰 기대는 안 하게 됐다. 그런데 사람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기대하게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애써 외면하려는 것들. 그러다 실체를 어림짐작해야 할 때가 올 때, 내 상상과 달라 기대가 부서질 때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껏 그래 왔던 대로 나만 실망하고 끝나면 될까? 아니면 나의 서운한 감정에 대해 토로해야 할까?
ㅤ직설적으로 당신한테 실망했다고 말하는 건 내가 제일 못하는 짓이다. 역시 직접적인 가해자가 되는 건 싫다. 그런데 아쉽고 서운한 마음은 가시질 않아서 어떤 식으로든 올라오게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역시 직언을 하는 게 답인가. 내가 그 직언들로 상심했던 날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데, 내가 그래도 되는가에 대해. 나는 이런 고민을 하기에 너무 지친 듯하다. 역시 납득이 답일까? 아니면 고백을 해야 하나? 고백 후 얼어붙는 분위기도 미칠 듯이 싫다. 혼자 앓으며 받는 스트레스와 상대가 내 눈치를 보는 걸 감내하는 스트레스가 비등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도 행복하지 않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저 얘기하라고만 한다. 하지만 나는 시시각각 모든 걸 털어놓는 어떤 미친 인간들한테 수 차례 시달렸고, 그로 인한 상처로 여태 아파하는 중인데 마음에 있는 걸 털어놓는 게 쉬울 수 있을 리 없다.
ㅤ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상대가 괜히 미워지는 순간이 온다. 왜 나만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걸까. 나만 이 관계에 진심인 걸까.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줄까. 다 귀찮아서 대화를 포기하게 되는데, 이 귀찮음을 이겨내고 말을 걸어도 ‘얘기하진 않았지만 사실 내가 원래 그래.’들과 마주할 때 또 알 수 없는 분노가 치솟는다. 나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상대에게 이해를 요구하는 것들을 상대가 알아주길 바란다면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꺼낸 말들이 당신을 불편하게 해도, 그걸 알아야 소통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결국 듣는 말들이 ‘얘기하진 않았지만 사실 내가 원래 그래.’였다면 우선 화가 나는 것이다. 왜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ㅤ대화가 관계의 종말을 예고하는 전조나, 그럴 만했다는 걸 보여주는 증빙 자료 혹은 지표밖에 되지 못한다면 대화를 하는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이런 실망감을 죽어도 표출하고 싶은 내 마음이 결국 욕심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 또한 그런 무심함으로 남을 상처 입힌 적이 없지 않았을 텐데, 내가 나의 공격성을 표출해도 될까. 정당한가. 아무리 타당한 감정이라도 정당한 대응인지 죽어도 모르겠다. 서로가 서로를 견디다 더이상 견딜 수 없이 부서졌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오면 헤어지는 게 관계의 본질일까? 아니면 내가 그저 비관에 익숙한 사람인 걸까?
ㅤ골몰하다 보니 닿은 생각이, 결국 나는 관계를 위한 대화를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이 답답한 이유는 잘못하지 않았는데 잘못했다고 고할 때 드는 억울함과 맞닿아 있다. 내가 나쁜 쪽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몰라주는 너희들이 나쁘다고. 그래도 여전히 나는 너를 비슷한 마음으로 좋아하는데 너는 그렇지 못할까 봐 두렵다고. 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품은 미지의 악순환적 기대는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거라는 확신 아닐까. 실제로 그들이 내가 소통을 시도했다고 꺼려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이것을 숨길 만큼의 이성이 있다. 그 말은 언젠가 돌아 돌아 나의 방식도 노력이었음을 이해할 거라는 말이다. 결국 본질은 이해 받고 싶다는 욕구에 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열렬히.
ㅤ아직은 이 희망을 붙들며 살고 있는데, 이것까지 깨지면 나는 무슨 마음으로 관계를 만들고 이어나가야 할지 또 방황하게 되리라. 희망을 가져도 될까, 따위의.